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시우스의 이교 박해 (문단 편집) == 배경 ==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로마 황제들은 자발적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국가 정책에 기독교 진흥을 반드시 반영했다. 그 결과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밀라노 칙령 후 70년이 지난 380년대에는 제국 인구의 50% 이상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기독교를 믿지 않고 조상들이 믿던 신들을 계속 따르는 이들이 여전히 많았으며, 사회 지도층 내에서도 이런 인물들이 많았다. 379년 1월 19일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에 의해 동방 황제로 선출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니케아 공의회|니케아파]] 신자였고 모든 제국 신민이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발칸 반도를 휘젓는 [[고트족]] 토벌에 전념하는 상황에서 이교도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는 사원이나 이교도 조각상을 유용한 공공 자원으로 보존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이교도인 에우톨미우스 타티아누스를 아이깁투스(이집트) 치안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능력있는 이교도들을 중용했다. 여기에 지난날 기독교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던 이교 신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희생제 금지령을 내리거나 짐승의 내장을 꺼내 점을 치는 등 미신 행위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권고' 수준에 그쳤다. 테오도시우스가 집권 초기에 초점을 맞춘 대상은 이교도가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 암약하는 [[이단/기독교|이단]]을 정죄하는 것이었다. 380년 2월27일 그라티아누스와 함께 [[삼위일체론]]을 믿지 않는 자들을 "어리석은 미치광이"로 규정하는 [[테살로니카 칙령]]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니케아파가 아닌 모든 기독교, 특히 아리우스파를 억압하고 그가 다스리는 동방 영토 전역에 니케아 정교회를 세우는 데 사력을 다했다. 이로 인해 아리우스파 신자들의 거센 반발을 사서 제국 내에 그의 정통성을 시험하는 반란이 종종 일어났지만, 테오도시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종교 정책을 밀어붙였다. 황후 [[아일리아 플라킬리아]] 역시 남편의 뜻을 받들어 공개적으로 병자, 고아(특히 소녀), 과부, 굶주리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그들에게 정통 교리를 설파하고 아리우스파를 배척하라고 가르쳤다. 반면에,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는 이교 관습을 억압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로마]]부터가 [[로마 다신교]]의 온상지였고, 서방에서의 기독교의 위세는 동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한 편인 만큼 이교도들의 힘을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라티아누스는 모든 미신적 관습을 금지하고 마녀 및 마술사들을 처형한다는 칙령을 반포했으며, 오랜 세월 로마의 신들을 모시던 최고 신관, 즉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에서 물러난 뒤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로원에 설치되었던 승리의 제단(Altar of Victory)을 폐쇄했으며, 로마 건국 때부터 줄곧 함께 했던 [[베스타]] 신전의 해체를 시작했다. 382년, 그라티아누스는 이교도 사제들이 재산을 물려주는 걸 금지했고 모든 이교도 사제들의 특권과 면책권을 박탈했다. 또한 모든 이교도 사원들과 성소들은 정부에 의해 몰수되며 그들의 수입은 황실 재산으로 전용된다고 선언했다. 오랜 세월 로마 다신교를 신봉했던 사람들은 그의 이 같은 정책에 큰 충격을 받았고, 원로원은 승리의 제단을 재건하고 베스타 신전을 복구시켜 달라고 청했다. 심지어 일부 기독교 관료들도 제국의 분란을 염려해 황제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라티아누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급기야 교회법을 따르지 않는 관료들을 처형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383년, 브리타니아에서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그라티아누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그라티아누스의 이교 억압 정책에 반감을 품은 이들이 대거 가담했고, 그라티아누스는 결국 반란군에게 패배해 목숨을 잃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발렌티니아누스 2세 마저 축출하려던 막시무스에게 전령을 보내 그가 이탈리아의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용인해준다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막시무스의 지위를 인정해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막시무스는 384년 평화 조약을 체결해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일리리쿰 서부에서의 종주권을 인정했고, 자신은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의 황제로 공인되었다. 이후 막시무스는 이교도들을 온건하게 대하는 정책을 실시해 그들의 환심을 샀다. 특히 386년에 사원들과 축제들을 돌보는 것은 이교도들의 독점적인 특권이라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387년, 막시무스는 평화 협약을 위반하고 이탈리아로 진격해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축출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에게 선전포고했고, 388년 7월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가 이끄는 로마군을 파견해 막시무스를 공격했다. 막시무스는 이에 맞서 사브 강 근처의 사스키아에 진영을 두고 적과 대치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몇 번의 전투에서 모조리 패했고 병사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에 프랑크 족이 북부 갈리아를 침략하면서 막시무스의 입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막시무스는 아퀼레이아로 달아났으나 적에게 포위되자 항복했고 자비를 간청했지만 곧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 전체의 권력을 손에 쥔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가 이교에 온건적인 태도를 취한 것에 대응해 자신을 기독교 수호자로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이교 탄압 정책을 단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